탤런트 이순재씨(73)는 최근 이른바 ‘제일 잘 나가는’ 배우 중 하나다. 인기의 잣대라는 CF가 이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씨는 MBC ‘거침없이 하이킥’ 이후 무려 5개의 CF에 출연하고 있다. 보험,약품,카드,아이스크림,패스트푸드 등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야동순재’ ‘마늘순재’ ‘악플순재’ 등 10대들이 그에게 붙인 별명도 다양하다. 40줄에 접어들어도 퇴출되는 연예계에서 70대 스타가 탄생한 것이다.
이씨처럼 화려하진 않아도 우리 주위에는 나름대로 풍성한 노년기를 개척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 일터에선 떠났지만 새로운 인생을 위해 젊은이 못지 않게 뛰고 있는 것이다. △공동체와 사회공헌에 힘쓰는 자원봉사형 △새 직업을 얻기 위해 수련하는 구직학습형 △자신의 기술과 노하우를 교육하는 지식전수형 △다시 일터로 나가는 재취업형 등 모습도 다양하다. 실버사회를 이끌고 있는 액티브 시니어들. 거침없이 투지를 내뿜는 그들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서울 양재동에 있는서초노인종합복지관의 금요일은 평소보다 더 분주하다. 47명의 ‘특별한 노인’들이 모이는 날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이름은 ‘OPAL(오팔·Old People With Activity) 선생님’. 보건복지부 주관하에 복지관이 진행하고 있는 교육형 노인일자리사업에 참가하고 있는 노인들을 부르는 말이다. 오팔 선생님들은 서울 시내 복지관,유치원 등에서 어린이,장애인들을 대상으로 한자,바둑,동화,수학,경제,독서,예절 등 12과목을 가르치고 있다. 이들은 소일거리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보통 노인들과는 ‘급수’가 다른 사람들이다.
대부분 전직 교사나 교수, 최고경영자(CEO) 출신으로 아동교육에 관심이 있는 노인 중 소정의 교육을 마친 이들만이 오팔 선생님이 될 수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매주에 한번 보수교육도 받아야 한다. 오팔 선생님들이 금요일마다 이곳을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올해 67세인 안강선씨(사진 오른쪽)와 63세의 박길자씨는 오팔 선생님들 중 ‘젊은 피’에 속한다. 지난 해 4월 ‘입사’했으니 이제 신입사원 티를 갓 벗어난 셈이다.안씨는 한자를, 박씨는 독서지도를 맡아 교육 최전선에서 젊은이 못지 않게 뛰고 있다. 교사로 30년 넘게 일한 이들이 또다시 선생님의 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입사동기인 두 사람은 손자같은 기자에게 이야기 실타래를 쉼없이 풀어냈다.
안씨는 “지난 2002년 교사에서 퇴직한 이후 여러가지 일을 했어요. 병원관리업체, 운수업체 등 여러 곳에서 일해 봤죠. 그런데 역시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하나봐요. 비록 보수는 확 줄어들었지만 (웃음) 다시 선생님이 되니 하루하루가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네요”라고 재취업 이유를 설명했다. 오팔 선생님의 보수는 월 최대 20만원으로 교통비 수준이다.
박씨는 “솔직히 저나 안선생님이나 공무원 연금도 있고, 자식들이 용돈도 주니 돈을 목표로 일을 할 필요는 없잖아요. 게다가 오팔 선생님은 그냥 일이 아니라 우리가 평생 해온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잖아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안씨는 이에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는 기쁨이 있죠. 전 내곡동의 다니엘복지관에서 정신지체 장애아들을 가르치는데, 아이들의 한자 실력이 늘 때마다 어찌나 기쁜지 몰라요. 스승과 제자 사이의 사랑을 일컫는 ‘레포’(reppo)가 절로 느껴져요”라고 화답했다.
안씨는 요즘 몸이 열개라도 ‘스케줄’ 소화가 힘들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노인치고는 쉴틈이 없다고 한다.
안씨는 오팔 선생님 일을 하지 않는 날에는 중앙노인보호전문기관에서 노인학대와 관련된 방송모니터링을 맡고 있고, 보건복지협회에서 하는 결혼정보자원봉사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결혼정보자원봉사는 말하자면 젊은 사람들 중매 서는 일이에요. 우리나라 저출산이 문제라는데 그냥 볼 수만 없다고 생각해서 시작한 일이죠”라고 설명했다.
바쁘기는 박씨도 마찬가지다.복지관에서 하는 ‘고고서초’(노인들이 참가하는 지역사회 인식 개선운동)에 참여해서 강사로 일하고 있다고 한다.그는 앞으로 신문활용교육(NIE)을 받은뒤 강의에 접목 한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워놓고 있다고 했다.
박씨는 “예전 지식만으로 가르쳐선 안 된다는 생각 때문에 한 일”이라면서 “공부 안 하는 교사는 정말 최악의 교사라고 생각하거든요. 마땅히 해야 할 일이죠”라고 말했다.말만 들으면 20대 청년 교사의 생기가 살아 있다.
안씨는 이 말에 무릎을 탁 치면서 “박선생님 말씀은 교사 뿐만 아니라 저희 노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다”면서 “자기 할 일을 하지 않고도 대접만 받길 원하는 노인들이 많아요. 예를 들면 다들 줄 서 있는데 노인이라는 이유로 새치기 하고 그러는 이들 말이에요”라고 꼬집었다.
박씨도 공감을 표시했다.박씨는 “남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되죠. 일하지 않고 젊은이들의 손만 빌리려 하는 행동은 정말 피해야 한다고 봐요. 노인들이 먼저 잘해야지 젊은이들도 노인들을 공경하고, 그런 문화가 형성될 때 나라도 발전할 수 있는 것 아닐까요”라고 말했다.
안씨는 이런 면에서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힘줘 말했다.즉 일할 능력과 의사가 있지만 놀고 있는 노인들을 적재적소에 넣는 방법이 필요하며, 어느 동네에서는 무엇을 잘 하는 노인이 산다는 식으로 노인들에 대한 현황 자료를 데이버베이스(DB)로 만들어 일자리가 나면 바로 연락을 취하는 등의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정책대안까지 제시했다.
두 사람의 대화 속에 성공적인 고령화시대의 해법이 들어 있었다.
/star@fnnews.com 김한준기자
■용어설명 : OPAL선생님
고령화시대를 대비한 국책사업으로 보건복지부에서 주관하며, 서초구청과 구립서초노인종합복지관에서 사업을 수행하는 교육형 노인일자리사업을 뜻한다. 월 급여는 최대 20만원이고, 60세 이상 노인만 참여 가능하다. 복지부는 이같은 교육형일자리를 지난해 1만2000개에서 올해 1만6500개로 늘릴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