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벌고 운동도 되고 젊은이 영역까지 진출
일하며 즐기는 노년(老年)늘어 "쓸모있는 사람 된 기분"
"겨자를 한 스푼 퍼먹었다는 상상을 해보세요"라는 강사의 말이 떨어지자 김순자(84) 할머니는 몸서리를 치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주 좋은 와인을 마시고 있어요"라는 말에 김선순(여·66)씨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가상의 와인 냄새를 마셨다.
지난 8일 오후 3시 서울 서초노인종합복지관 5층 강당에 백발의 노인 40여명이 모였다. '실버 모델' 강습 현장이었다. 분홍 꽃무늬 셔츠를 입은 할아버지, 마스카라와 립스틱까지 곱게 화장한 할머니들은 강사의 연기 지도를 받은 뒤 영화·드라마 출연이나 광고 모델이 될 기회를 얻게 된다.
김순자 할머니는 지난달 대한가스공사의 1컷짜리 광고 사진을 찍고 15만원을 받았다. 김 할머니는 "우울증에 시달리다 자녀들의 권유를 받고 시작했는데, 돈도 벌고 활력도 되찾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아들이 사줬다는 연두색 바지에 분홍색 꽃무늬 재킷, 예전 같으면 엄두도 못 냈을 목이 깊게 파인 진홍색 라운드 티셔츠를 자랑했다.
▲ 일하는 노인은 몸도, 마음도 건강하다. 연기 교육을 받는 노년의 배우·모델 지망생들 표정 연기가 실감 난다. 8일 서울 서초노인복지회관에서./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백발(白髮)의 택배원
전통적으로 '노인 일자리' 하면 남성은 수위나 경비직, 여성은 청소직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최근엔 노인들이 택배원·주유원은 물론 미용사며 바리스타(커피 전문가) 같은 젊은이 영역까지 진출하고 있다.
최석산(75) 할아버지는 5년 전 노인들이 지하철을 타고 물품을 배달해주는 '노인복지 지하철 퀵서비스'라는 회사를 차려 사장이 됐다. 65세 이상은 지하철 요금이 공짜라는 점에 착안한 사업이었다. 최 사장은 "나이 들었다고 집에만 있고 싶지는 않았다"며 "아침밥 먹고 어디 나갈 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곳에서는 65~78세의 노인 10여명이 지하철 택배원으로 일하고 있다. 택배물이 무겁지 않은 보청기 회사나 법무사 사무실 등이 단골 고객이다. 지하철을 이용하기 때문에 다소 느리다는 단점이 있지만 요금은 보통 퀵서비스업체보다 30~40% 저렴하다.
3년째 이 회사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영균(74)씨는 매달 30만원 정도를 번다. 김씨는 "운동도 되고, 무엇보다 내가 경제활동을 한다는 점이 고맙다"고 말했다. 최 사장도 직원들 월급 주고, 사무실 유지비를 빼고 나면 손에 쥐는 돈은 동료들과 비슷한 수준이다. 그래도 "무엇보다 맘 편하게 일하면서 책 읽고 담소 나누는 공간이 있어서 좋다"고 했다.
서울 용산에 위치한 태성주유소는 주유원 15명 중 7명이 50~70대다. 하루에 8시간씩 일하고 임금도 젊은이들과 같게 받는다. 이 주유소 이강업(54) 사장은 "노인들은 책임감이 강하다"며 "출근시간에 늦지 않고 이직률이 낮아 꾸준히 노인을 고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틈새 일자리를 찾아라
지난 22일 경남 남해군에서는 '투어 토커(tour talker)'라는 이름의 생소한 집단이 활동을 개시했다. 지역사회를 꿰뚫고 있는 토박이 노인 11명이 주인공이다. 투어 토커는 지역사회 거주자가 그 지역을 방문하는 외지 관광객들에게 온·오프라인으로 관광지·음식점·숙박 등 관광 정보를 컨설팅해주고, 가이드며 특산물 직거래 서비스를 제공하는 직업을 일컫는다. 투어 토커 홈페이지(www.tourtalker.co.kr )에서 경남 남해 코너를 방문하면 이들에게 질문을 남기고 상담을 받을 수 있다. 이들 11명은 농어촌 체험·음식·문화관광·레포츠·교통 등 각자의 '전문 분야'를 나눠 담당한다.
남해문화원장을 역임한 경력을 살려 문화관광 투어 토커로 나선 장대우(68)씨는 홈페이지에 '운무(雲霧)에 가려진 남해 금산', '전국 3대 기도처 중의 하나인 보리암' 등의 사진을 올려놨다. 가천 암수바위에 얽힌 전설과 유래도 '옛날이야기'처럼 재미있게 풀어놨다. 남해 인구와 면적까지 줄줄 꿰는 그는 "우리 고장 알리기에 한 몫 거들고 싶어서 나섰다"고 했다.
노인 '투어 토커' 프로그램을 주관하는 한국노인인력개발원 강익구 사업개발팀장은 "컴퓨터를 쓸 줄 아는 노인을 대상으로 3주간의 교육을 거쳐 22일부터 업무를 시작했다"며 "월 60만~75만원의 소득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저렴한 가격에 안마를 받거나 머리를 손보고 싶다면 서대문종합복지관의 '실버뷰티샵'을 찾으면 된다. 이곳에는 미용사·안마사 자격증을 가진 어르신 10명이 활약하고 있다. 격일제로 일하고 매월 20만원 이상을 받는다. 조만간 '네일아트' 서비스도 제공하기 위해 열심히 훈련 중이다.
관악시니어클럽에서는 노인들이 즉석 두부전문점 '콩깍지'를 운영하고 있고, 안산시상록구노인복지관에서는 노인들이 '실버인형극단'을 꾸려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인형극 활동을 하고 있다.
◆"TV 시청이 줄었다"
직업을 갖게 된 노인들은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고, 우울했던 삶에 활력소가 생겼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로 노인들이 일을 하게 되면 삶의 질이 향상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복지부가 2008년 공공 분야 노인 일자리 참여 노인 및 대기자 1200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한 결과 참여 노인의 78.3%가 '경제적으로 보탬이 된다'고 응답했다. 노인들은 하루 일과 중 18~24%를 유급(有給) 노동에 할애하는 대신 비생산적이고 고립된 생활 패턴으로 이어질 수 있는 TV 시청시간 등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 일자리를 가진 노인들의 경우 그렇지 않은 노인에 비해 연간 의료비가 18만8000원 덜 들었고, 참여기간이 1년 증가함에 따라 연간 6만8000원씩의 의료비가 절감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공기관 고지서 납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이모(72·경기 고양시)씨는 "이전에는 동네 노인들끼리 화투 치고 TV 보는 것이 전부였는데, 일을 하면서 밖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늘었다"고 했다.
기사원본보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6/25/2009062500023.html